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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안 소녀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고등학교와 같은 부지를 쓰는 남학교로,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다. 얕은 산 기슭을 깎아 만든 터에 산 쪽엔 중학교 건물, 그 앞에 고등학교 건물. 그 앞에는 중고교가 같이 사용하는 운동장이 있는,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닌 사립재단이 세운 학교였다. 학교가 있는 산 밑에 바로 철도가 놓여 있어서 등하굣길이 꽤 특이했는데, 그 구성을 하교 기준으로 설명해 보자면:
 
 1 스테이지 - 중학교 건물 입구를 나와서 운동장 옆 경사 낮은 언덕길을 지나 교문까지 이백여 미터(고도 수십 미터쯤을 내려오게 된다).
 
 2 스테이지 - 그 교문 앞에서부터 철도 위에 높게 세워진 다리가 곧 이어져 그 끝까지 백여 미터(다리는 평평해서 건너는 동안 고도는 변하지 않는다).
 
 3 스테이지 - 다리 끝에서부터 평지까지 이어진 계단 한 백 개.
 
의 3 단계로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학교를 나와 좌우에 서점, 문구점들이 있는 시멘트 길을 보너스 스테이지 삼아 몇 분 걸어 버스 정류장까지 오면 그것이 저녁의 하굣길이었고, 이 순서를 반대로 가면 아침의 등굣길이었다. 등교시 최대의 관문은 역시 3 스테이지인 다리로 이어지는 계단이었는데, 그냥 걸어 올라가도 힘든 곳을 지각을 면하기 위해 뛰어올라갔다 싶으면 다음 언덕길에선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아침 광고지 전단을 돌리는 아주머니들도 계단 위로는 올라온 적이 없었고 동네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교문 밖이고 위험해서 기합 장소로 이용된 적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달까.
 
 등굣길부터 저 모양인 남학교 중학생 생활이라는 게 뭐 별거 있었겠는가. 나는 평범하게 학교를 다녔다. 등교, 수업, 하교의 되풀이. 방과 후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주먹야구도 고등학교는 그 때까지도 수업 중이었기 때문에 자주 못 했었다. 그나마 2학년 말인가에 버스를 두 번 갈아타서 총 50분 정도 걸리는 먼 곳으로 이사했는데 무슨 법 때문이었던가 전학을 못 한 탓에, 수업 끝 때쯤엔 집에 일찍 가려는 마음만 있었던 거 같다.
 
 그래도 '여자애들에게 관심을 갖는 게 놀림거리가 아닌 나이인 중학생'인 반 녀석들이 자랑해대는 '저쪽 여학교 애들 중 누구는 어떻더라, 아 나 그 애 안다던가, 언제 만날 거라던가' 하는 이야기에 물론 나도 껴서 듣기도 하고, 이성에 대한 판타지를 구상해서 친한 놈들과 나름 논하기도 했었지만, 그때 난 여자애란 존재는 위 말처럼 남들 이야기나 머릿속 망상의 세계에 둘 뿐, 내 현실로 끌어올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여자애들과 잘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생각이 설마 없었으랴 싶지만 행동으로 옮긴 적은 한번도 없었고, 하교 때 단골 서점에서 드래곤볼이나 해적판 북두신권 등을 사서 집에 숨겨 들어가선 공부하는 척 하고 그 책이나 봤던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초여름 날.
 
 나 혼자 하교가 늦었다. 청소 때문이었던가 선생님의 잔심부름 처리 때문이었던가.
비 오는 저녁. 고등학교 건물도 3학년 층쯤만 빼곤 다 어둡고, 괜히 더 멀어 보이는 철길 위 다리까지 길에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이나 켜져 있는 시간. 젖은 언덕길을 우산 없이 내려오며 투덜투덜하는 동안 빗발이 더해져서 인상 쓴 얼굴을 숙이곤 좁은 시야로 익숙한 길을 계속 걸었다. 다리 끝 쯤, 문제의 3스테이지 계단에 가까이 왔을 때,
 "저기요."
의외의 여자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가로등 밑에 한 사람이 우산을 하나 쓰고 서 있었다.
유일한 가로등 불빛에 빗줄기만 빛날 뿐, 그 건너 짙은 색 우산 그림자 안은 어두웠다. 몸이나 얼굴은 나랑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한테 말을 걸었나? 보통 때 하교 시간은 이미 지났고, 백여 개 계단을 빗속에서 걸어 올라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있는 사람도 흔하지 않을 테니 주변엔 지금 저 사람과 나 뿐일 테고, 그쪽에서야 내 얼굴이 보일 테니 그게 맞는 것 같은데.
 "우산 같이 써요. 비 많이 오는데..."
 확실히 그 사람은 나한테 말을 걸고 있었다. 동글동글한 목소리에 하의는 치마, 여성용 운동화를 맨발에 신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정도나 파악되는 우산 속의 누군가. 여자애인가? 난 멀뚱멀뚱 그냥 서 있었고 그 여자애라고 생각되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내 머릿속에 모르는 여자애가 같이 우산 쓰자고 했을 때는 어떻게 대처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드디어 날 때쯤, 그 여자애가 내 쪽으로 와서 왼손으로 우산을 바꿔 잡더니 오른쪽에 나란히 서서 우산을 같이 썼다.
 "……"
여전히 난 그냥 서 있었는데, 여자애는 내가 오른쪽으로 맨 가방이 걸려서인지 우산 잡은 손을 오른 손으로 바꾸곤, 빙글 내 앞을 반 바퀴 돌아서 왼쪽에 섰다. 우산 그림자 속에서 긴 머리와 긴 팔 겉옷이 내 앞을 지나갔다. 곁눈질 대부분으로 여자애를 보니 나를 보진 않고 계단 쪽을 보고 있었는데, 가로등 불빛이 우산을 뚫고 들어올 리가 없으니 우산 안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그래도 뚫어져라 쳐다보면 옆얼굴이라도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했으나 왠지 망설여지고 더 어색해졌다.
 
 여자애가 먼저 걷기 시작했다. 우산 안은 여전히 어둡고 바깥은 가로등이 빗줄기와 계단만 비추고 있을 뿐, 소리도 빗소리만 들린다. 정말로 조용한 건지 맨 정신이 아니라 다른 소리가 안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싶을 때쯤, 그냥 누구냐고 한번 물어볼까 싶었을 때 쯤 여자애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이상한 사람 아녜요."
 "아... 예."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의문이 겹치니 생각의 진행이 멈춘 채 몸만 계단을 내려간다. 정신이 없다 보니 물 고인 곳도 피하진 않고 발을 내 딛게 되었는데 문득 보니 여자애도 그렇게 내려가고 있었다. 어색한 건 마찬가지인가보다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중간쯤 왔을 때 다리 밑으로 열차가 시끄럽게 지나가기 시작해서 여자애와 나는 괜히 놀란 듯이 잠깐 멈춰 섰다가 그저 계단을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계단을 다 내려섰다. 서점이 있는 거리는 대부분 가게가 다 문을 닫았고, 사람들도 없이 그저 빗물이 고인 물웅덩이만 가득한 상황. 그나마 거리답게 계단 위보단 밝았으므로 여자애를 보려고 하니,
 "걱정이 되서요."
라고 그 여자애가 말을 먼저 꺼냈는데 나는 그걸 듣고 정말로 놀라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들로 잔뜩 어색해진 내게 그 말이 준 충격은 마치 내 혼을 실은 3단 로켓이 1단 '누구길래 우산을?', 2단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의 분사를 끝내고 3단 '나를 걱정했다고?' 부스터가 점화되어 초속 11km에 이를 풀 파워로 우주를 향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예?"
 
"비가 많이 오는데 아직 안 내려와서... 아침엔 비 안 왔잖아요?"
 "아아..."
 여자애의 모습이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온다. 어깨를 넘어가는 생머리에 자그마한 얼굴. 아직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이목구비는 어디서 본 듯도 하다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했는데 확실히 모르는 여자애다. 키는 나 만하고, 맨발에 운동화. 편해 보이는 상하의에 덧입고 있는 겉옷은 남의 것인 듯 안 어울린다. 일이 있어 외출한 차림이라기 보다는 집에 있다가 비가 오니까 손에 잡히는 대로 챙겨 입은 듯한 모습.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일까?
 
"어… 그런데 누구세요?"
 드디어 꺼낸 질문에 여자애는 대답 없이 비에 젖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곤 아무 소리도 말도 없었는데 눈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그냥 버스 정류장까지 가요."
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모르는 여자애라는 게 확실해지고 의문은 하나도 풀리지 않아 내 어색함은 더해졌지만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으므로 일단 여자애와 함께 걸었다. 길에 빗물 고인 웅덩이는 계단에 있던 것들보단 당연히 컸다. 이젠 주변이 밝기도 해서 웅덩이를 피해 걷기 시작하다 보니 여자애와 나는 가끔 부딪히기 시작했는데, 그게 더욱 나를 어색하게 해서 난 온 정신을 여자애의 몸에 안 닿게 걸으려는 데에 집중, 물웅덩이가 많은 곳을 지날 때는 여자애 발만 보며 어느 쪽으로 갈 지만 쳐다보았다. 여자애도 마찬가지였는지, 서로 물웅덩이 앞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 지 몰라 그저 서 있게 된 적도 있었는데 점점 여자애가 먼저 걷고 나는 따라가는 식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길이 많이 드러난 곳에선 긴장을 억지로 풀고 여자애를 슬쩍 쳐다보기도 했는데, 여자애는 길바닥만 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색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이런 모습 누가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친구들이 보면? 같은 생각이 그제서야 들기 시작해서 나는 점점 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행동과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버스 정류장이 가까운 사거리까지 어느새 왔다. 아까까지는 아무도 없었는데 여기서부터 사람들이 종종 보여서 나는 약간 부끄럽단 기분이 들기 시작했는데, 여자애도 그랬던 건지 잠깐 멈칫 하더니 방향을 바꿔 근처 가게의 가판대 처마 쪽으로 향했다. 우산이 없어도 비를 안 맞을 수 있겠다 싶은 곳으로.
여자애는 처마 앞에 섰고, 나는 우산 속에서 나왔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면서 보니 가게의 백열등 불빛에 여자애는 전보다 더 잘 보였다. 약간은 길다 싶은 앞머리. 짙지만 두껍진 않은 눈썹. 쌍꺼풀은 없었던가 싶은 눈에 좀 긴 편인 코… 얼굴을 보는 걸 알아차렸는지 우산을 낮게 써서 입만 보인다.
 "아녜요. 또 오세요."
 가지런한 이가 드러난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또 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없어 난 정말 정신이 나가기 직전이었다. 여자애는 살짝 웃고는 다시 학교 쪽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멀어진다. 거의 이쯤 되면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의문만 남기고 사라졌다. 귀신이 사람을 홀린다는 게 이런 것인가? 우산 씌워 준 거야 고맙긴 한데... 난 넋이 90%는 나간 채로 학교 쪽 길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타야 할 버스가 문득 나타나서 일단 정류장으로 뛰었다.
 
 
 
 집에서도, 다음날 학교에서도 여자애는 누구였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났다. 걱정했다는 사람이 정말 나인가? 또 오라는 건 뭐지? 같은, 나에게는 세계 7대 불가사의보다 더 복잡한 그날의 괴현상은 해명할 단서가 당연히 조금도 없었다. 정말로 모르는 여자애였다 뿐. 계속 생각을 했지만 남들에게 말하고픈 화제도 아니었고 뭘 말해야 할까도 의문 투성이었으므로 겉으론 조용히 속으론 정신 없이 하루를 보냈다.
 
  하굣길엔 보통 그랬듯이 서점에 들렸다. 앞서 말했듯이 그 때는 이런 저런 만화책들이 정식이나 해적판으로 많이 나올 때라 학교 앞 서점에서도 팔고 있었고 난 그런 책들에 얼마 안 되는 용돈을 밥을 굶고도 다 투자하는 단골 손님이었다. 북두신권 같은 걸 팔았다는 게, 그것도 중학생한테 주는 게 괜찮았던 거냐 싶기도 한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안녕하세요."
 부채질을 하던 주인 아주머니가 인사를 받아준다. 학교 앞 서점이라는 게 뭐 다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그 곳도 입구 쪽부터 몇 안 되는 책장과 계산대를 겸하는 진열대가 놓여 있고, 진열대 너머에 미닫이문이 달린 방 한 칸 정도가 있는, 주인의 생업과 거주를 겸하는 형태였다. 그 때 같은 여름엔 선풍기를 방 안에 두고 회전 강풍 모드로 거주인과 손님의 냉방을 처리할 법한. 그런 영세성과는 상관없이 입학하게 되면 자주 들락거리게 되니까 학교 앞 서점이라고 하는 것이겠지. 명찰도 파고 체육복이나 문구류도 사게 되고 말이다.
 어쨌든 진열대 앞에서 북두신권 다음 권이 아직 안 나왔나 뭐 또 재미있어 보이는 거 없나 하던 중에 아주머니가 다른 학생의 주문을 받으러 가는 걸 슬쩍 따라 보다가, 건너편 열린 미닫이 문 방 안이 눈에 들어왔다. 남의 집 방 안 보는 게 예의는 아니었겠지만.
 
 그 여자애가 있었다.
 
 벽에 기대고 무릎을 세우고 앉아 보던 책을 덮고서 나를 내다 보고 있었다. 난 아마 놀란 표정이었겠지만 여자애는 살짝 웃고는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같은 표정을 짓는다. 선풍기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는 어제 본 것보단 길어 보인다. 여름 차림에 가늘고 하얀 팔다리도 어제완 다르다.
대충 정신이 돌아와 나는 간단히 말없이 인사를 했다. 그런 모습이 이상했는지 여자애는 또 웃고는, 답례를 했다. 그리곤 주인 아주머니가 내 쪽으로 돌아오자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는 듯 보였고, 난 아무것도 사지 않고 서점을 나왔다.
 
아아. 여기 사는 애였던가.
서점엔 자주 들르는 편이었지만 난 그 여자애를 본 적이 없었는데, 여자애는 저렇게 방 안에서 나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던가.
알게 된 건 그것뿐이었지만 꽤 안심한 듯한 기분이 되었고, 그걸로 대충 나머지 의문을 무마했던 것 같다.
귀신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탓도 있었겠지.
 
물론, 서점에 가면 또 있겠지 싶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다음날 등굣길에 그 서점에 들러 보니 방 문은 닫혀 있었다.
하굣길엔 문 열린 방 안에, 회전 모드로 돌아가는 선풍기와 함께 그 여자애가 있었다. 그 다음날도.
난 주인 아주머니가 딴 데 가 있으면 간단히 말없이 인사를 했고, 아니면 대충 쳐다보고 말았지만 여자애는 항상 살짝 웃는 걸로 받아주고는 다시 책을 읽거나 했다. 책을 볼 때는 항상 덮여 있었고 날 보고 나서 읽기 시작했던 거 같다. 먹거리가 담긴 접시가 여자애 옆에 있을 때도 있었는데 먹는 걸 본 적은 없다. 항상 내가 올 때 쯤엔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난 서점에 들어가기 전에 먹던 아이스크림 같은 게 있으면 다 먹어버리나, 짧은 머리도 한번 쓸어 넘기거나, 옷 매무새도 한번 봤었던가... 했었고, 안에선 만화책 말고 참고서도 좀 기웃거리는 등, 나름대로 꽤 신경을 썼던 것 같다.
 
그렇게 하굣길엔 난 항상 서점에 들렀고, 여자애는 방 안에 있었다.
 
내 또래라 학생일 듯한 여자애가 왜 하교할 때쯤에 항상 집에 있는지,
주인 아주머니와 그다지 닮은 것 같지도 않은데 무슨 사이일지 같은 것도 가끔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뭔가 물어본 적은 없다.
그 여자애도 나한테 말을 건 적은 없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여름방학이 되어 보충 수업이 끝난 후론 한동안 학교엔 가지 않으면서 방학을 보냈다.
시내의 보습 학원을 그때도 다녔던가. 도서관 같은 데서 친구들과 공부한답시고 모여선 점심 먹고 놀았던가.
학교엔 한동안 갈 일이 없었고, 당연히 서점도 가지 않았다. 가끔은 그 여자애가 생각이 안 난 것도 아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가면 항상 있을 것 같은,
서로 인사 정도는 하는,
얼굴만 아는 여자애였으니까.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첫 날 등굣길엔 서점을 지나치고 하굣길에 들렀다. 왠지 '그렇게 하는 게 맞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전에 늘 그랬듯이.
 "어서 오세요."
진열대 뒤에 주인 아주머니는 없고 그 여자애가 있었다.
나는 당황했고 여자애는 전보단 크게 웃는 표정을 지었다.
 "책들 그 동안 많이 나왔네요."
여자애가 진열대 안의 만화책들을 가리킨다. 그 책을 보는 건지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건지 나도 잘 모르는 상태로 진열대 앞에 섰다. 당연히 방 안에 있을 때보단 여자애가 가까이 있겠지. 계속 진열대만 바라보게 된다. 긴장되어서인가.
 "아줌마는 어디 갔어요?"

 고개를 숙인 채로 대충 해 댄 말을 여자애가 내 바로 앞에서 받는다.
 "도매 집에 책 받으러 직접 갔어요. 새 학기 참고서요."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리니 왠지 고개를 못 들겠다. 옆으로 새 책들을 살펴보는 척 피해서야 고개를 들어서 여자애를 봤다. 여자애가 날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좀 달라 보이는 게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건지, 방 밖에 있어서인지... 어색한 기분이 드는 것이 처음 그 여자애가 우산을 씌워주었을 때 같았다.
나는 괜히 진열대에서 떨어진 책꽂이까지 가서 참고서를 몇 개 들춰 대다가 입구 쪽의 진열대까지 살펴보곤 신학기 문제집 하나를 들고 다시 진열대로 돌아왔다. 여자애는 책을 받아 들고 가격을 보았다.
 "삼천원이예요."
서로 책과 돈을 주고받고는,
 "안녕히 계세요."
 "또 오세요."
말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오늘은 뭔가 달랐다.
처음 봤을 때 이후론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었는데, 방학 후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마주 서서 이야기를 해서였을까?
그날 다음부터는 여자애는 가끔씩 그렇게 진열대 뒤에 서서 서점 일을 도왔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 여자애 이야기가 가끔 나왔다. 누구냐는 이야기엔 나도 궁금했고, 주인 아주머니도 그냥 조카뻘 된다라고만 대답했다는 이야기엔 의아했다.
그리고, 꽤 예쁘지 않느냐는 이야기엔 왠지 화가 났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습관처럼 하굣길엔 서점에 들렀고,
항상 그 여자애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보통 가게에 들어갈 때 하듯 인사를 건네면,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를 받아주었다.
새로 나온 만화책이나, 날씨가 어떻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항상 여자애가 먼저 덧붙였고, 나는 항상 짧게 대답했다.
살 게 있으면 계산을 했고, 아니면 그냥 나오면서 인사를 했고, 여자애는 살짝 웃으면서 받아주었다.
 "안녕히 계세요."
 "또 오세요."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 난 하굣길엔 서점에 들렀고 거기엔 그 여자애가 있었다.
 
 
 
 어느덧 가을.
주말 다음 날 등굣길에 보니, 서점의 문이 아직 열리지 않고 있었다.
하굣길에 보니 아직도 열리지 않은 채였다.
그렇게 3일인가가 지난 아침에 서점은 문을 열었고, 나는 늘 그랬듯이 하굣길에 서점에 들렸다.
 
그 여자애는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에도.
몇 주가 지나도록 계속 서점에 들러 보아도 그 여자애는 없었다.
 
친구들 간에도 여자애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간간히 나왔다.
정확한 이유를 아는 녀석은 없었다. 내가 모르는 녀석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여자애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으면 그 자리를 피하고 있었고 결국 서점 주인 아주머니에게도 여자애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난 사실 왜 없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항상 여자애가 있었던 때처럼 서점에 들러서, 오늘은 없구나 하면서 나왔을 뿐이었다.
 
왜 없는지 알게 되면,
그 다음날부터는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게 될 테니까.
 
가면 항상 있을 것 같은,
서로 인사 정도는 하는,
얼굴만 아는 여자애였으니까.
 
그저, 언젠간 다시 있겠지 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매일 하굣길에 그 서점에 들렀고, 여자애는 계속 서점에 없었다.  
 
 
 
 
 2년 전 쯤 긴 연휴 때에 중학교에 다시 한 번 가본 적이 있다.
학교는 신축 건물이 몇 개 늘었고, 조경도 많이 좋아졌지만 철길과 그 계단은 그대로고 계단 밑 길에는 여전히 서점들이 있다.
그런데 내가 자주 들리던 단골 서점이 대충 어디였는지는 알 수 있었지만, 그 때 그 주인 아주머니가 주인인지는 이젠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여자애가 아직도 없는지는 당연히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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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0 22:44 2007/07/10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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