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27 04:58
고모할머니
충분히 여러 날이라고 생각한 뒤 어느 밤에야 없던 날들의 반향인듯 커져서 돌아오는 것 같다.
토요일 밤에 고모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벌써 꼭 일 주일이나 되었다. 2주 동안 끌어안고 있던 발표과제를 끝내고 홀가분해져서 나는 개강모임이랍시고 죽이 맞는 사람들과 진창 술을 퍼먹다 2시인가 3시가 다 돼서 집에 갔다. 택시비가 모자라 집에 올라갔는데 통화도 안 되는 엄마는 나갔다고 하고 만 원짜리 한 장 없는 동생이 자고 있었다. 나는 옆동네 있는 외할머니댁으로 택시 아저씨를 몰고가서 택시비를 얻었다. 주정뱅이의 막장을 달리고 있던 그 때 고모할머니는 병원에서 의식을 잃으셨다. 새벽 1시쯤 병원에서 온 위독하다는 연락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엄마가 병원으로 갔었고 외할머니 혼자 먼저 댁으로 돌아와 계시다가 술처먹은 손녀 택시비를 치러 집으로 돌려보내셨다. 택시에서 걸었던 내 전화가 결국 숨을 거두셨다는 소식인 줄 알고 할머니는 가슴이 내려앉았다고 했다.
고모할머니가 마치 꼭 봐주신 것만 같다고 생각하는 내 안도는 이기적인 것 치고도 못난 방식이다. 하지만 할머니 심장은 그 밤을 힘겹게 넘겨 다음날에야 마침내 뛰기를 멈추었다. 의식을 잃으신 지 만 하루 만이었다. 세상을 떠나신 것이 그 전날 밤이었더라면 나는 지금처럼이 아니라 정말 그래야하는 꼭 그만큼을 다 챙겨서 부끄러웠을 것이다. 다음 날 내가 술이 깨끗이 깰 만큼 진양 퍼자고 일어나 꾸물꾸물하다 그제사 의식없는 할머니 옆에 찾아가 서성이다 돌아간 뒤 한 시간 후에 할머니는 숨을 거두셨다.
의식을 잃은 날 낮까지만 해도 할머니는 괴로워하면서도 또박또박하셨다고 한다. 마침 옷이 모서리에 걸려 배나온 모양이 된 외숙모더러는 막내닮은 아들 하나 더 낳으라고 덕담하셨단다. 내가 갔던 그 전전날에도 할머니는 골똘하게 작은 두유 반 병을 빨아드시고 쌀쌀하고 귀엽게 "이제 그만."이라고 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할머닌 작고 가볍고 유난히 귀여워지셨다. 중년까지 할머니는 살집도 상당히 있고 엄청난 포스의 소유자였다. 올케인 우리 외할머니는 그런 시누님이랑 미묘하게 사이가 있었는데 나는 안정적인 외할머니를 더 좋아했지만 '상사의 귀싸대기를 날리는' 전설을 가진 고모할머니는 기가 센 대신 좀 방외인이었다. 고모할머니보다는 온건하지만 적어도 외할머니보다는 다혈질인 우리 엄마는 자기 고모랑 유난히 친했고 또 잘 했다. 고모할머니도 참 파란만장하신 분이니까 엄마한테는 그런 고모에 대한 애정과 안쓰러움이 있었고 고모할머니도 첫째 조카를 귀엽고 안쓰러워했다. 우리 이모도 삼촌들도 다 나름대로 잘 했지만 고모할머니랑은 엄마가 제일 가까웠다.
나는 그것 때문에 좀 불편했다. 엄마가 일 년에 두어 번 외국에 출장갈 때마다 전주에 혼자 살고계시던 고모할머니가 올라오셔서 우리를 맡아보셨다. 객관적으로 생각해서야 엄마가 미성년자인 자식들을 며칠씩이나 그냥 두고 갈 수 있을 리가 없지만 제깐에야 언제나 다 컸고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나는 고모할머니가 좀 방해물이었다. 노인들 특유의, 눈이 침침한 탓의 깨끗지 않은 설거지도 싫었고--라고 투덜거렸을 때 엄마는 그걸 애초에 네가 해야지 할머니가 하시게 뒀냐고 화냈지만 뭐 그렇게 되는 구조가 있다. 나는 거의 일어나자마자 학교에 튀어가는데 아침에 설거지할 시간이 어딨으며 내가 돌아와서 할래도 할머니가 벌써 해놓으신다는 그런 뭐 당당하지는 않지만 나름 억울한 사정이랄까, 하여간 당신께서도 한 성격하는 할머니가 특유의 콧방귀를 뀌시며 공손한 척하다가도 제 분에 못이겨 곧잘 본색을 드러내는 내 사춘기의 지랄발광 주요장면을 목격한 것도 내겐 할머니에게 잡힌 악몽같은 약점들이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나면 할머니는 나와 동생에게 만 원씩 쥐어주시고 떠났다. 한사코 사양해봐도 학교 갔다와보면 책꽂이 위에 놓아두고 가시곤 하는 그 만원짜리의 감칠맛에 나도 점점 그러려니 하곤 받아챙겨갔다. 여유도 많지 않았던 할머니가 꼭 주고가던 만 원.
대학을 간 후에는 -그 즈음이 아마 엄마 출장 때문에 오신 걸로는 거의 마지막이었을 텐데- 내가 차로 서울역까지 모셔다 드릴 수 있어져서 초보운전으로나마 우쭐댈 수 있었다. 그 때 유턴 안 되는 염천교 지하차도 위에서 할머니 내려드린다고 유턴하다가 경찰한테 딱 걸린 게 내가 처음 끊었던 딱지다. 둘이 황당해서 막 웃었었다.
얼마 후 치매 때문에 정리하고 요양원에 들어가셨지만 할머니 치매는 당뇨로 인한 거라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퇴행성 치매랑 달리 좀 왔다갔다 했다. 어느 날은 고등학생인 내 동생더러 왜 네 남편 유인촌(!?! 제길 왜 하필이면;;;이지만 나름 이유가 있긴 했다) 안 데리고 왔냐고 하시는가 하면 어떨 땐 예전 엄마랑 전주 할머니집 놀러갔을 때마냥 아무렇지도 않게 참외 깎아먹으며 키득키득 수다를 떨곤 하셨다. 바로 지난 어버이날에 찾아갔을 땐 요즘 명바기는 하는 짓마냥 영 인기가 없는 모양이라고 시사평론도 하셨다.
새 정부가 상큼하게 일을 시작하던 그 무렵 귓구멍콧구멍마다 썅썅바를 꽂아도 시원찮을 보건복지부가 양로원 및 요양원 시설의 노인들까지 비정규직화하는 빌어먹을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1년마다 건강상태를 검진해서 A~C급으로 나눈 뒤 아주 중증(죽어가는 상태여야 함)에 해당하는 노인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멀쩡하니까(??) 나가라고 하는, 한편 조금 덜 중증인 노인은 다음 해까지만 시설에 남을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그리고 다음 해에 다시 검사해서 반복-하는 내용이다. 기간제 계약직 양로원이라니 장난하냐? 모처럼 평온하게 생활하시는 것 같았던 할머니는 전전긍긍하셨다. 고집쟁이에 독불장군인 데다 다른 양로원에 크게 데어본 적이 있는 할머니는 공동생활이라든가 양로원이란 것도 싫어했다. 내 입장에서 단언할 내용은 아니지만 그런 할머니가 이 양로원에 대해선 돌봐주는 분들 칭찬도 하고 룸메이트 할머니들이랑 스스럼없이 지내고 얼굴도 반짝반짝 편안해지는 걸 보면서 우리 모두 안심하고 고마워했었다. 거기 계시는 분들이 좋은 분들이셨다.
할머니 암이 도진 게 꼭 저 빌어먹을 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하진 않겠다. 정답도 아닐 것이다. 걱정 때문이었는지 걱정도 무색하겐지, 할머니는 그렇게 유예당했던 1년조차 채 못 채우고 돌아가셨다. 막판에는 한창 때의 할머니를 아는 사람이라면 믿을 수 없을 작고 가볍고 하얀 몸으로, 호흡장치에 매이고 아파서 똑바로 하지도 못한 자세로 누워서 물고기처럼 온몸으로 팔딱팔딱 숨을 쉬었다. 정말 고단하고 연약하고 우두커니 지켜보기 미안한 호흡이었다.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우리 집 근처의 작은 요양병원으로 올라와 계시게 한 후로 나는 문안을 몇 번 못 갔다. 다른 가족들이 번갈아 가느라 며칠에 한 번씩만 가도 문제는 없었지만 학교 때문이라든가 바쁜 일 때문이라든가 하면서 그 며칠도 장담했던 것보다 언제나 훨씬 길어졌다. 그냥 산책나가듯 갔다. 처음 한두 주 동안 아무것도 싫다며 오로지 복숭아 작게 자른 것만 겨우 좋다며 드실 때가 있었는데, 가서 복숭아 깎아다 한 깍두기씩 넣어드리면서 그냥 나 하고싶은 말이나 졸졸 지껄이면 할머니는 무심하게 '응' '응' 하다가 '쉬었다 줘'라든가 '이제 복숭아는 그만.'이라든가, 또 내가 '할머니도 일본 많이 갔었잖아요? 어디어디 갔었어?' 하면 '다 갔어. 난 안 가본 데가 없어'라고 역시 단호하고 귀엽게 하고픈 말만 하셨다. 나는 한없이 약해진 할머니와 뒤늦게라도 더 친밀하고 싶어서 어설프게 이것저것 했지만 할머니의 favorite은 절대적으로 우리 외할아버지와 엄마였고 정성조차 부족한 나는 엄마의 딸로서 겨우 3, 4인자 노릇 정도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스스로 비웃었다.
막판에 할머니가 마음이 너무 약해져서 모두 암이 재발한 것에 대해서는 숨겼다. 결과적으로는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숨긴 것이었고 가능하면 그러지 않는 것이 좋았겠지만, 할머니도 스스로 대강 느끼고 계신 것 같았다. 대신 엄마는 할머니한테 삶을 정리할 시간과 실마리를 드리고 싶어서 여러 번 살짝살짝 줄기차게 물었는데, 할머니는 아랑곳않고 무심한 듯 쉬크한 답으로 일관하셨다고 한다.
"고모 누구 꼭 연락해보고 싶은 사람 없어?" "어." "특별히 기억나는 건?" "없어." "나한테 꼭 하고싶은 말 없어?" "어" "아님 뭐 하고싶지 않아?" "어" "고모 누구 생각나는 사람은 없어?" "너."
별 의미없는 것이었다 해도, 혹은 그 때 생각나는대로 말씀하신 것뿐이었다 해도 오히려 그렇기에 마지막의 "너"라는 대답에, 그리고 그나마 대답하신 또 하나의 유일한 답 같은 답에 나는 매번 눈물이 난다. "할아버지(고모할머니 아버지)에 대해선 말하고 싶었던 거 없어?" "돈은 쌓아뒀다 그 년 다 주고..."
고모할머니의 유일한 형제인 외할아버지와 그로부터 나온 고모할머니의 조카들과 그 아이들. 나를 비롯해 열 몇 명 남짓한 우리 외가 식구들이 고모할머니의 얼마 안 되는 친지였고 문상객은 한 분 한 분이 고마울만큼 소중했다. 단촐한 빈소였다. 발인할 때까지 꼬박 빈소를 지키며 꼭 우리끼리 엠티온 것 같았다. 고모할머니를 주제로, 또 가끔은 할머니를 까먹어가며 손님치르는 용으로 마련된 생선전과 북어국으로 다같이 밥을 먹고 농담을 하고 가끔 글썽이다 청소를 했다.
입관 때도 작고 말갛던 할머니는 화장을 마치고나자 더 한 줌이었다. 장지에 묻어 자연스럽게 흙이 되도록 분골을 하지 않았다. 나는 처음 가족이 되어 유골을 보았다. 따로 빻지 않은 유골은 가루가 아니라 잘 삭은 나무처럼 구성진 재덩어리였고 할머니의 뼈도 거기 오롯이 있었다. 화장장 직원분은 쓰레받기로 쓸어담아 거칠거칠한 나무함에 제법 되는 부피를 꾹꾹 눌러담았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할머니의 얼굴, 할머니의 등. 귀에만 남아있는 목소리를 생각하며 나는 또 어김없이 수진이를 생각하고 내 고모를 생각하고 다시 고모할머니를 생각하고 수진이를 생각하고 고모를 생각하고 고모할머니와의 기억들을 생각했다.
엄마조차도 평생 본 일이 없었던 할아버지의 억눌린 울음을 우리 모두 처음 보았다. 그래서 나는 학원에 가있을 동생과 옆에 선 내 사촌동생들과 내 이별을 생각하며 또 울었다. 외할머니를 생각하며 울고 엄마를 생각하며 울고 아빠를 생각하며 울었다. 내 아는 사람들에 대한 내 애착만큼을 비잉 둘러보고 또 할머니에게 되돌아가며 울었다.
하지만 역시 떠난 이에 대한 눈물은 마음을 놓고서도 얼마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사양없이 찾아오는 것 같다. 마음 저 깊숙이 차곡차곡 내려가기 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