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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와 시민권
(설동훈, 전북대학교수)
시민권과 국적
시민(citizen)의 문자적 의미는 도시(city)에 거주하는 사람이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 거주한 ‘자유인 성인 남자’와, 중세 유럽의 자유도시에 살았던 봉건적 속박에서 해방된 ‘상인과 수공업자’가 시민이었다. 그러나 18∼19세기 이후 시민은 이제 더 이상 도시의 주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국가(nation-state)의 성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시민이 특정한 나라의 ‘국민’과 동의어가 된 것이다.
국민국가는 국민(nation)과 국가(state)의 합성어이다. 국민은 공통의 유산과 공동 운명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공동체’이고, 국가는 특정 영토를 통제하는 ‘법률적·정치적 조직’이다. 국민국가는 영토 내에 거주하는 평등한 시민들을 통합한 ‘정치적 공동체’로 정의할 수 있는데, 외부인은 그 나라 시민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국민국가의 특성은 가상 개념인 세계국가(universal state)와 대비함으로써 뚜렷이 부각된다. 세계국가에서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시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상 인류 공동체는 국민국가를 단위로 나뉘어져 있으므로, 한 나라의 시민은 다른 나라의 시민이 되기 힘들다. 즉, 국민국가는 시민권(citizenship)을 기준으로 자국인과 외국인을 차별하고 있다.
시민은 시민적·정치적·사회적 권리를 가진 주체다. 시민은 참정권을 비롯한 여러 가지 ‘권리’를 누림과 동시에, 공동체와 국가에 봉사할 ‘의무’를 진다. 이상적으로 볼 때, 시민은 하나의 국민국가에만 소속될 것이고, 그것을 근거로 국민국가는 그 영토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시민으로 포섭한다. 대개 국민국가를 단위로 하는 시민권은 ‘어떤 나라의 국민이 되는 신분 또는 자격’을 의미하는 국적(nationality)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 경우 시민과 국민은 동의어이다.
그러나 국민국가 체제에서 시민과 국민 사이에는 근본적인 대립이 존재하고, 그것은 반유태주의·인종주의 등 여러 형태의 갈등으로 표출된다. 국민국가는 그 영토 안에 살고 있는 특정 집단의 사람들에게는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거나, 문화적 동화(cultural assimilation)를 강요하곤 한다. 국민국가는 공식적으로 시민권을 소지한 사람 중 완전한 소속감을 갖지 못하고 있는 집단에 대하여 권리의 일부를 박탈하기도 한다. 국민국가 내부에 출신국·계급·성·민족·인종·종교 및 기타 기준에 의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은 일부 집단은 완전한 시민이 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는 19세기 영국사회에서 부자를 비롯한 체제적응자들과 소외 계층이 마치 서로 다른 국민처럼 산다는 점을 들어 한 나라에 ‘두 국민’(Two Nations)이 존재한다고 평가하였다. 1980년대 영국의 대처리즘(Thatcherism)이 완전고용과 계급타협을 기반으로 한 복지국가를 배격하고 냉혹한 경쟁의 논리와 소유적 개인주의를 주창한 것을 빗대어, 제솝(Bob Jessop)은 ‘두 개의 국민 전략’(two nations policy)이라 평가한다. 여기서 ‘두 국민’이란 부당하게 차별당하는 집단, 완전하지 못한 시민권을 가진 집단, 혹은 권력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된 국민이 존재함을 빗댄 것이다.
전지구화와 다중정체성
전지구화(globalization)는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시민권에 새로운 도전을 만들어내고 있다. 국경을 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동은 ‘국민국가의 소속’이라는 기초 자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외국인 인구가 증가하여 문화적 가치와 관행의 이질성이 급속히 증대하고 있다. 문화접변과 동화 과정이 진행될 겨를조차 없다. 국민국가의 경계 자체가 허물어지고 있다.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여러 개의 시민권을 갖고 두 개 이상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시민권이 있는 나라가 아닌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국제이주기구의 추계에 의하면, 2000년 기준 다른 나라에서 생활하는 사람 수는 1억 5천 만 명을 초과한다. 과거 각 국 정부가 가졌던 경제와 복지체계 및 국민문화를 통제하는 권력이 잠식되고 있다. 전지구적 시장, 초국적 기업, 국제지역기구와 초국가적 국제기구, 그리고 새로 확산된 국제적 문화가 점점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한 나라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는 사람이라는 시민 개념은 점점 근거를 상실하고 있다.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 시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있다. 또한 시민으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있다. 구멍이 숭숭 뚫린 국경과 다중정체성(multiple identities) 때문에 국민국가라는 문화적 공동체에 강한 소속감을 갖지 않은 시민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실천 공간으로서 국민국가라는 토대를 잠식하고 있다.
한 사람의 개인이 하나의 국민국가에 귀속되는 시민권 개념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게 되었다. 국민과 시민이 동의어가 아닌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국민국가 모형 자체가 심하게 침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수준에서 하나 이상의 사회에 동시에 소속되어 있으며, 따라서 여러 개의 집단정체성(collective identities)을 가진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는, 시민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시민권의 부여 기준이 반드시 국민국가일 필요는 없다. 그래서 시민권의 외연을 확대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발리바르(Etienne Balibar)에 의하면, 인권 운동은 ‘시민의 권리’를 ‘인간의 권리’로 확장하는 것이다. 국민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세계사회의 시민에게 부여되는 시민권 개념이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다.
한국의 이주노동자와 시민권
‘이주와 거주의 자유’는 세계인권선언에 규정되어 있는 인간의 기본적 인권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유가 허용되는 것은 대개 제한된 국경 내에서일 뿐이다. 일정 범위를 넘어서면, 출입국 서류, 이민, 내지 국적 전환 등의 문제와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국민국가는 자국인과 외국인의 출입국을 통제하고 있고, 그것을 주권의 한 부분으로까지 간주한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외국인은 사증(visa)이나 체류허가(residence permit)·취업허가(work permit) 등의 규제를 받는다. 국민국가는 자국민의 취업 기회를 보호하기 위해 이러한 조치를 취한다.
2002년 말 한국에는 36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가 생활하고 있었다. 한국정부는 국내 노동력 부족에 대처하기 위하여 외국인력을 받아들이되 이민자 혹은 시민권자로서가 아니라 ‘일정 기간 노동력만 제공한 후 되돌아 갈 사람’(temporary migrant workers)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혈통에 기반을 둔 민족 개념을 신봉하는 한국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외국인노동자가 정착하여 단일민족의 신화가 훼손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내 이주노동자 중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되는 사람은 합법취업자 3만 명뿐이다. 즉, 법률적 '근로자'는 전체 이주노동자 중의 9.2%에 불과하다. 나머지 '근로자가 아닌 노동자'는 산업연수생 4만 명과 미등록노동자 29만 명으로, 각각 '현장 실습을 통해 산업기술을 익히는 연수생'과 '체류기간을 초과한 관광객 또는 몰래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이다. 이렇게 한국정부는 이주노동자를 철저히 차별하고 배제하여 왔다. 국적에 근거한 차별 속에서 이주노동자는 ‘인간’이 아니라 관리·통제·처분의 대상일 뿐이다. 생산기능직 이주노동자의 대다수는 한국사회 ‘근로자’의 일부로 포함되지 못하고 있다. 이주노동자의 기본권이 침해당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무현 정부는 생산기능직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에게 ‘근로자’ 신분을 부여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고용허가제도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 역시 이주노동자를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민주국가와 전지구적 시민권
사회의 모든 성원들은, 민주주의를 유지·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시민으로서 정치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공통의 역사·문화를 가진 ‘국민’이 될 수는 없다. 이러한 딜레마를 푸는 방법으로 두 가지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
첫째, 전지구화의 압력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시민권의 양식이 필요하다. 국민국가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국민’을 해체하고, 그것을 개방적이고 유연한 소속감에 기초를 둔 ‘민주국가 시민’으로 대체해야 한다. 시민권을 국민국가라는 문화적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에게 부여하는 관행을 탈피하여, 한 국가의 영토 내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도록 바꾸어야 한다. 그 나라 출신, 가족의 거주, 경제활동 혹은 문화적 참여 등 다른 중요한 연고도 시민권을 부여할 수 있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예컨대, 독일은 1999년 ‘시민권과 국적법’(citizenship and nationality law)을 개정하여, 전통적인 혈통주의 원칙에 출생지주의 원칙을 결합시켜, 독일 태생 외국인 자녀들의 시민권 획득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둘째, 국가의 경계를 뛰어 넘어 국제지역적 내지 초국가적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중요한 정치적 의사 결정에 사람들이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고안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이주노동자는 한 국민국가의 ‘국민’에서 배제된 이방인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사회의 일원인 세계시민의 정체성을 갖출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개인간 혹은 출신국간 불평등을 극복하여, ‘개인간 평등’과 ‘집합적 차이의 인정’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시민권 개념을 개발하고 추구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