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을 봤을 때 참 묘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유령과 키스하기라는 제목으로 내 사진첩에 저장했었다.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겠다.
이 사진을 보면서 프란체스카 우드만(1958-81)을 떠올렸다. 예전에 우연한 기회에 프란체스카 우드만의 갤러리에 접속했었다. 그녀의 사진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호기심으로 프란체스카에 관해 알아보다가 김소영씨가 프란체스카 우드만에 관한 글을 쓴 것을 알았다. 흥미로운 글이어서 저장했었다.
프란체스카 우드만(Francesca Woodman)은 여성 사진 작가다. 그녀는 1958년에 태어났다. 13세에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그리고 23세가 되던 생일 날, 창문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 맨하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그의 사진전을 기획했던 에르베 샹데스는 이렇게 말했다.
"움직이고 있는 그녀의 몸, 그것은 유령같은 그리고 사라져 가는 현존을 보게 하면셔, 프란체스카 우드만은 지나가는 것, 일시적인 것, 변해 가는 것과 부서지기 쉬운 것을 시사한다. 유예된 순간을 잡아내는 것보다 이러한 사진들은 슬며시 사라져 가는 것에서 시간을 보게 한다....항상 사라지기를 원하면서 우드만은 자신의 주변 혹은 다른 장소들 속으로 녹아들거나 스스로를 상실한다. 그리고 사지 절단이라는 생각과 희롱하면서 조각난 몸의 폭력적 평온을 암시한다."
그렇다. 우드만은 마치 자신이 유령인 것처럼 초상 사진을 찍는다. 프랑스의 작가 필립 솔레르는 그래서 우드만을 여마법사라고 불렀다. 솔레르의 이런 이름 부르기는 사실 남성 초현실주의자들의 관행을 그대로 잇는 것이기도 하다. 남성 초현실주의자들은 한편으로는 여성을 처녀, 어린 아니, 천상의 피조물이라고 부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마법사, 에로틱한 대상 그리고 팜므 파탈이라고 불렀다.
그런 의미에서 우드만은 마법사가 아니라 갑자기 나타난 유령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유령이 유령의 자기 초상을 찍는 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재현을 생생하게 유령화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거듭거듭 돌아와 불안정한 어떤 지점을 보여주며 정체성이 주변에 통합되는 것을 방어해주는 깨지기 쉬운 막을 창조하면서 폭발시킨다.(마가렛 선델) 유령 사진 작가를 불려옴으로써 우리는 여성의 몸에 대해 또한 여성의 자기 재현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애나 멘디에타(Ana Mendieta)라는 사진작가이자 연행 예술가가 있다. 그녀는 '흔적으로서의 몸'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풍경과 여성의 몸(내 자신의 실루엣-그림자-에 기반한) 사이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사춘기 시절 내 고향인 쿠바에서 찢겨나온 경험의 직접적 결과라고 믿는다. 나는 자궁(자연)에서 추방당했던 감정에 압도당한다. 내 예술은....모성의 근원으로의 회귀다. 내 대지/몸의 조각을 통해 대지와 하나가 된다. 나는 자연의 확장이 되며 자연은 내 몸의 확장이 된다."
프란체스카 우드만이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되돌아온다면 애나 멘디에타는 자신의 몸을 그림자, 실루엣으로 재현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대지의 인화된 채 사진으로 출현한다. 그녀의 Siluetas라는 연작에서 그녀와 자연의 융합은 무덤이자 자궁의 이미지다. 멘디에타는 1948년 하바나에서 출생해 1985년 37살에 34층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의 남편이던 조각가 칼 앙드레가 그녀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무죄 선고를 받았다.
우드만과 멘디에타라는 여성 예술가가 보여주는 여성의 몸은 현존을 통한 존재론이 아니다. 또한 부정의 힘으로서의 부재의 존재론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작품은 여성의 몸을 실증적으로 경험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피해가고 거부한다. 오히려 실종과 회귀, 사라짐과 거듭 돌아옴, 바로 그 사이의 공간에서 우드만 자신의 몸은 어떠한 전사(前史)도 없으며 도 미래도 없을 것처럼 출현한다. 그런가 하면 현재는 현재성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카메라가 잡은 것은 어떤 공간과 시간을 지나가는 한 유령과도 같은 존재. 그래서 카메라는 그것을 포착하되 포획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유령화된 것은 전체가 아니라 일부다. 그녀의 몸의 반은 유령화되고 나머지 반은 실체에 잡혀있다.
2. 사이의 미학-교환과 사용을 거부한다
우드만이 자신의 몸의 자기 재현을 통해 드러내는 것은 사이의(in-between)해방이다. 그녀는 간발의 차이를 만들어 상징화되고 고정되는 순간이 요구하는 지속성으로부터도 빠져나간다. 질주와 도주와 탈주가 반-영웅적(그래서 여전히 영웅주의에 입각한) 남성의 것이라면, 사이의 공간과 시간에 살짝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러나 거듭거듭 되돌아오는 우드만의 유령은 여성적 상상계가 허용하는 역(liminal), 문지방의 형상화다. 반면 멘티에타는 실루엣, 그림자, 흔적을 남기고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 돌아올 필요가 없다. 그녀는 어머니의 대지로 합체되었기 때문이다. 그 융합은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왜 이러한 형상화로 여성은 드러나는 것일까?
여성의 몸에 대한 지배적 통제와 담론을 살펴보면 이러한 갑작스런 나타남이나 그림자로 나아있음, 즉 '출현'과 '흔적'이 가지는 무의식의 정치학을 알 수 있다. 여성의 몸은 인류학적으로 교환의 대상(레비-스트로스)이며 국가적 차원에서는 어머니의 육체로 환원된다. 모성을 갖기 이전 그녀는 사회적 노동에서 가장 하위 질서에 위치된다. 산업 자본시대에서는 값싼 노동력이며 글로벌 자본시대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서열화된다. 여성의 몸은 신화에서 노래하는 대로 풍요와 다산의 장소가 아니라 늘 교환되고 사용되는 무엇이다. 우드만이 유령으로 돌아올 때 그녀의 몸은 사실 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비껴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다 유령화되지는 못한다. 우리는 막 유령화되는 그녀의 몸의 일부가 교환과 사용가치의 흔적인지, 아니면 구체화되어 있는 나머지가 그것의 흔적인지를 알 수 없다. 반인반수처럼 그녀는 어느 쪽의 범주로도 쉽게 미끄러지지 않는다.
사진 작가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 13세, 이후 23세의 죽음은 그녀가 사용과 교환의 네트웤, 그 외부에 혹은 주변에 머무를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지점의 선택이기도 할 것이다. 구체적 몸 혹은 완벽하게 투영될 수 있는 몸이 아니라 반은 추상적이고 반은 구체적인 몸의 재현을 통해, 우드만은 사라지고 싶으나 사실 사라질 수 없는 여성 육체를 실험장으로 만든 몸의 속박과 해방을 동시에 보여준다. 사라지는 순간, 그녀는 유령이 되지만, 몸의 반은 그 투명함, 추상화를 거부하면서 구체성으로 남아있다. 유령이 되는 순간 그녀는 여자 귀신, 여귀가 되는 것이며, 구체적이 되는 순간 그녀의 몸은 사용과 교환의 기호가 되는 것이다.
그녀의 사진은 이 이중의 속박과 양날을 밀어내면서 바로 그 사이의 공간에서 미학적 자기 배려의 순간을 만든다. 그래서 사라지는 순간이 갑자기 나타나는 순간인 것 같고 또 그 반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녀의 미학적 숭고함은 그로테스크하며, 바로 그 기이함이 여성적 숭고의 근간이다. 그러나 프란체스카 우드만의 사진에서 여성의 이 같은 미학적 자기 배려가 사진의 프레임과 스튜디오 외부에서도 지속될 수 있다는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가 자신의 몸의 재현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구체와 추상이 비껴 나간 듯 결합된 여성의 몸에 대한 존재론이며, 이 존재론에서 출현하는 것이 실험적 여성 형상이며 여성의 몸이다.
프란체스카 우드만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남성적 시간과 공간 사이에 현현한 여성/몸에 대한 성찰과 재구성적 활동이라는 인상을 갖는다. 여성/몸은 시간과 공간에 드러남으로 존재하나 남성의 시각/렌즈에 의해 보여져 있는 실체이며 대상이다. 그것의 거부는 자기의 시각으로 자신의 몸을 구현하며 기록함으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프란체스카의 작업인 것 마냥 보인다.
그녀의 사진을 따라가 읽다보면 남성의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비존재적 부적응의 실체를 접하는 것 같다. 영혼의 부적응 상태가 몸으로 구현되어 몸이 현존하는 시간과 공간에 부조화 상태에 있음을 고발하는 것 마냥 적나라한 느낌을 받는다.
여성/몸 정체성은 구체적 실체가 없이 비실체로서의 보여지는 현상이며 언제라도 소비되어 폐기되어 사라질 수 있는 현실체로 남성의 시간과 공간, 감각에 의해 대상화된 물체로 규정할 수 있을까? 그 물체는 대상화된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계속 갱신되어 시간과 공간 속에 재현되며 드러난다. 그것을 주체적으로 거부하고 부정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그 몸을 부인하고 부정한다고 해도 몸을 이루고 역동적이게 하는 생명성과 생명성의 자유함은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긍정의 궁극점은 몸에 구현된 시간과 공간, 감각에서 자유하며 해방되는 것으로 과감히 자신의 몸을 포기하는 것이 되겠다.
부적응적 드러남을 주체적 사라짐으로 전환하여 영원한 자유자로 남는 길을 택할 수 있다면 용기있는 선택이 나을 것이다.